주보성인
사도 바오로의 생애
출생 연대와 출생지

33년경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
(사도 7,58). 그리고 바오로는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9).

바오로의 출생 연대 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은 이렇게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와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출생 연대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5-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바오로는 당시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타르수스(Tarsus)에서 태어났는데(사도 9,11:21,39:22,3), 그곳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으로,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킬리키아(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타르수스에는 유대인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오로는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하여 그 문화들을 익힐 수 있었다.

교회 박해

철저하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바오로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세인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그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마태 5,21-48)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 하는데 앞장섰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 이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갈라 1,13,23: 1고린 15,9: 필립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사도 6,11-14).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사도 5,57),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곳에 가기도 하였다(9,1-19:22,3-21:26,9-18).

회심

33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 한 점의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은 한 줄기 빛이 그를 땅에 쓰러뜨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가 땅에 넘어진 순간에 그의 몸에 비쳤던 빛은 그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비췄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께서는 바오로의 물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뉘우침과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면서도 마음은 온통 넘치는 희망으로 부풀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주께서 "일어나 읍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마땅히 무엇을 할 것을 네게 일러주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바오로는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그 후 극적인 개종을 불러일으켜 전 생애를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바쳤으며 그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이다. 예수님의 발현은 시공을 초월한 복음 전달의 상징이다(사도행전 9,1-18, 19:22,6-11 참조).

예수를 뵙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되었는데, 부활한 예수를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 순간에 달라진 회심이야 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전심전력한(2고린 4,5) 사도 바오로는 그 회심 사건을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갈라 1,15-16: 1고린 9,1: 15,8: 필립 3,12 : 2고린 4,6). 그런데 루카에 세 번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바오로 체험담이 아니고 루카가 그 체험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바오로는 회심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선교를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 하며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회심한 다음 그는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사도22,16) 설교하였다고 한다(사도 9,20-22). 그 후에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아라비아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 나는 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 1,17-18). 바오로는 아라비아에서 나바테야인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하였고, 36년경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극적으로 탈출하여(2고린 11, 32-33: 사도 9,23-25)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동안 게파(베드로)와 함깨 지냈다.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8년 동안(36-44년경) 전도하였다 (갈라 1, 19-24 : 사도 9,30 : 11,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1년동안 (44-45년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돌보았는데, 이 사실은 바오로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19-26절에만 적혀 있다.

바오로는 앞으로 세 차례를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수를 신봉하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사도행전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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